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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온에서 유일하게 액체 상태로 있는 은백색의 금속 원소 ;혹은 메르쿠리우스 ;혹은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
by mercure


2016/12/31 23:59

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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됴준메인 됴공준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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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ound_ID



2015/10/31 01:25

Cosmic Ride 中 └연








"김준면 씨?"


명확한 한국어가 귀로 꽂혀들었다. 에스프레소 잔에 설탕을 때려붓던 준면이 눈을 들었다. 웬 낯선 남자가 손에 든 사진과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서 있었다.


"...누구세요?"


발칙하긴 한데 건방지지는 않은 시선이다. 몇 살이나 먹었을까. 제 또래 젊은 남자인 것은 확실한데, 어떻게 보면 아주 어려보이고 또 어찌보면 아득히 나이먹은 표정 같기도 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라는 것을, 준면은 생애 처음 보았다. 이 수상쩍은 남자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치더니 말했다.


"좀 앉아도 될까요?"


턱으로 준면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묻는다. 얼떨결에 준면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켓을 벗으며 털썩 앉았다. 티스푼으로 커피잔을 휘저으며 준면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남자를 쏘아보았지만 그는 제법 뻔뻔한 낯이었다.


"아... 그렇게 경계하지 마세요. 원래 이런 궂은 일은 말단이 하는 거잖아요."
"말단?"
"기지에서 준면 씨를 픽업해오란 업무를 맡았거든요."


남자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준면은 쓰읍... 미간을 좁힌다. 이놈의 직장은 당최 쉴 틈을 안 줘.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연락이 왔는지 확인하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말하자면 그쪽은 내 후배란 거네요."
"그렇죠, 선배님."


기지 내에선 못 보던 얼굴이다. 준면은 잔을 입술에 대고 마시는 시늉만 했다.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준면은 얌전히 받아든다. 파일럿 도경수.


"휴가 전까지만 해도 못 들어본 이름인데."
"그러시겠죠. 본부로 파견된 지는 이제 막 일주일 남짓 지났으니까요. 아."


남자는 지나가던 웨이터를 불러세우더니 커피를 주문했다. 산뜻한 표정이다. 명함은 남자의 안주머니에서 준면의 안주머니로 이동했다. 커피잔 너머로 준면은 이 남자를 탐색했다. 말단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자연스럽고 노련한 초짜다.


"나 아직 휴가 기간 남아있는데?"
"네. 압니다. 휴가 나간 사람을 굳이 쫓아오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일손이 부족하니 그런 것 아니겠어요. 게다가..."
"......"
"말씀 안 드려도 아시겠죠? 저도 뭐, 알고 싶어서 안 건 아니고, 일이니까요. 이해해 주세요."


아마도 탈주 이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테다. 경수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이건 업무일 뿐이었으니까. 이거야 완전히 불온분자 취급이군, 생각하면서 준면은 설탕을 거의 같은 비율로 섞은 에스프레소를 한번에 삼켰다.

최근에야 그런 일이 없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준면은 세상 밖의 사람이었다. 그는 다 스러져가는 지구의 마지막을 만나기 위해 열심히 쏘다녔다. 대륙 이곳저곳으로 바다를 넘나들며. 최후로 남은 인류의 기분으로. 처음엔 휴가 기간을 훌쩍 넘겨 복귀하는 것으로 시작하다가 추후엔 기지에서 사람을 풀어 잡아와야 겨우겨우 끌려들어왔다.
그렇게 몇 년을 기지의 골칫거리로 지내다가 요즘은 역마가 뜸해졌다. 기운을 소진한 탓이기도 했고, 그래봐야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탓이기도 했다.

이번 휴가에 뉴욕으로 떠난 건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저 마침 가장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준면은 이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그는 이제 다시는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안 가. 난 안 가."


때마침 경수 몫의 커피가 나왔다. 팁을 건네더니 경수는 커피잔엔 손도 대지 않고 다리를 꼰 그대로 앉아있기만 했다. 입은 떼지 않는다. 경수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왜죠?"


한참만에 경수가 물었다.


"이제 나한텐 돌아갈 이유같은 거 없으니까." '그런건 처음부터 없었지만.'
"...뭐, 그렇기는 한데. 기관에선 당신을 부르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경수의 말은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 경수는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내려다보았다. 요 녀석도 물론 임무니까 하는 거겠지만, 그것 역시 그쪽 사정이고. 준면은 돌아가지 않을 마음을 굳힌 이상 이제 더이상 남 편의는 봐주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면이 주위를 두리번대며 말했다.
"설마 혼자 온 건 아닐테고."
"저 혼자입니다."
"...생긴거랑 다르게 유단자라든가?"
"아뇨. 보시다시피 책상 앞에만 붙어있던 인간이라서요."


...왜 이런 허술한 놈을? 분명 다행이어야 하는데 준면은 괜히 자존심이 상했다. 날 잡아오라고 여기까지 데려온 놈이 이런 의욕없어 보이는 인간일 줄이야. 준면은 의자에 걸쳐놓은 트렌치 코트를 집어들곤 뒤돌아서 카페를 빠른 걸음으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그를 뒤쫓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건 뭐, 최소한의 성의야 뭐야?'


따라오기는 하는데, 누가봐도 의욕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래도 그 무심한 태도로 졸졸 잘도 쫓아왔다. 저런 놈이야말로 아주 성가시다. 일단 '의무'라고 머리에 한번 입력되면 고집스럽게 이행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책만 판 놈들은 융통성이 없어서 안 돼. 준면은 속으로 혀를 차며 최근 며칠 동안 제게 익숙해진 거리를 빠르게 걸었다. 경수는 중간중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치를 구경하기까지 했다. 저정도 되니 오히려 자신이 있어서 여유부리는 거 아냐, 하고 준면은 의심했다. 그는 일부러 인파가 많은 대로변으로 나아가 사람들 틈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점점 미행인과의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경수가 사람들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준면은, 때맞춰 가구를 들고 옮기는 짐꾼들 뒤에 몸을 숨겨 골목 사이로 들어갔다. 이리저리 개구멍까지 통과해 오 분 정도를 더 걷다보니 이제 경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휴우. 셔츠에 가볍게 땀이 뱄다. 어서 씻고 싶다. 그러고나면 죽은 듯이 잠들어야지. 그는 옷깃을 펄럭이며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준면은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물론 그건 오산이었다. 호텔 방문을 열자마자 준면은 입이 떡 벌어졌다.


"안녕하세요? 좀 전에도 뵈었지만, 간만이네요."


그야 물론, 방금까지 절 따라오다 놓친 줄 알았던 스토커가 호텔 방 침대에 걸터앉아 잡지를 펄럭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놀라지 않겠는가. 준면의 어깨에서 코트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도경수는 태연했다.


"좋네요, 호텔. 역시 비싼덴 달라. 그쵸?"
"너... 너 어떻게 여길."
"끝까지 따라가보려고 했는데, 말했다시피 제가 워낙 책상에만 붙어있다보니 금방 지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바로 여기로 왔어요."


근데 정리 좀 하시는 게 좋겠네요. 잔소리까지 덧붙이며 경수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잡지를 한 장 넘겼다. 저, 저,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뻔뻔한 얼굴! 준면은 코트를 벗어 잔뜩 어질러진 바닥 위로 내팽개쳤다.


"내가 쉬는 게 못마땅해?!"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대사였지만. 그래도 경수는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그랬다면 진작에 연행해갔겠죠. 저 말고 다른 떡대들이. 휴가를 기다려주는 것 뿐이라니까요."


그러더니 남자는 소리나게 잡지를 턱, 덮었다. 지금보니 어젯밤 준면이 술에 취해 사들고 온 플레이보이였다. 저런 도색 잡지를 저렇게 눈썹 하나 까딱않고 읽는 젊은 남자는 난생 처음이다.

준면은 여기서 더 화를 내야 할지, 낸다면 뭐라 내야 할지, 혹은 이 인간을 쫓아내야할지, 아니 쫓아낼 수는 있을지-고민하며 할말을 골랐다. 그러나 이 상황에 적절한 말이 있을 턱 없다.

와중, 경수는 심드렁하게 잡지를 침대 위로 던져버리곤 몸을 뒤로 젖혀 쭉 폈다. 그리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말투로,


"배고프다."


하고 말했다. 






'내가 왜...'


호텔 근처 조그맣고 낡은 식당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애매한 시간대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테이블 너머에서 경수는 파스타를 씹고 있었다. 줄곧 일관된 심드렁한 얼굴로, 그러나 여전히 성실하게.


'내가 왜 얘 밥을 사주고 있는 거지...'


단언컨대 일생 중 최고로 어이없는 하루다. 준면은 이마를 짚었다. 그는 제 몫의 접시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식욕이 완전히 싹 사라져버렸다.


"안 드세요?"
"너라면 넘어가겠니?"
"그래요."


경수는 산뜻한 얼굴이다. 참 내. 그러면서도 준면은 자기 접시를 경수 쪽으로 밀어주었다. 경수는 또 사양 않고 준면의 접시에 포크질을 했다. 뜻밖에도 이 뻔뻔스러움에 대해 준면은 오히려 안도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런 제가 낯설었다.


"그 전엔 어디에 있었어?"


의외로 그 철판 깐 태도와는 다르게 도경수는 말수가 적었다. 그래서 준면은,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심심해서 입에 가시가 돋힐 지경이었고, 이렇게 모국어 수다 상대가 생긴 것도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있었어요. 인도, 중국... 유럽에도 잠깐 있었고. 남극도 한 번 다녀왔고."


중년의 가게 주인이 카운터로 나와 새로 음악 씨디를 오디오에 넣었다. 올드팝이 나오자 식당은 한 세기는 더 거슬러간 듯한 분위기가 됐다. 달그락거리며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가게엔 그들 외에 한 테이블이 더 있었는데, 가게 주인 연배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었다. 아마 부부인 듯했다. 남녀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속삭이는 말에 푸흐흐 웃음을 짓곤 했다.


"뉴욕에 한 번 와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경수가 갑자기 꺼낸 말에 준면은 약간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한 손에는 포크를 쥔 채 경수는 유리창 너머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기울어져 들어왔다. 입가엔 칠칠치 못하게 소스가 묻어있다. 그러자 아주 어리게 보였다.

결국 경수는 준면의 접시까지 깨끗이 비웠다. 경수는 먼저 문밖으로 나가있었고 준면은 계산을 마친 뒤 따라나왔다. 자켓에 두 손을 찔러넣은 채 경수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준면은 계산서를 한 번 훑은 뒤 코트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넣었다.


"자, 어차피 내가 장소를 옮긴대도 네가 날 놓칠 일은 없겠지? 의미 없는 짓이니까 난 그냥 아까 그 호텔로 돌아가 얌전히 잠이나 자고 있을게. 그러니까 여기서 이만 해산하자. 너 때문에 오늘 많이 걸었어. 나 좀 이만 쉬게 해줘."


준면이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빠르게 말했다. 정말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아까의 싱거운 추격전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이 남자와 오늘 예기치 못한 하루를 보냈다는 피로감이 무거운 탓이었다.
그런데... 경수는 제 인중을 긁적이며 머뭇거렸다. 설마. 준면은 싸한 예감이 들었다.


"실은 저 오늘 잘 곳이 없거든요."


준면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 모든 게 귀찮다. 이제 저항하는 건 완전히 관두었다. 


"네 마음대로 해라!"
"포기가 빠르시네요."
"누구 때문인데!"






심지어 경수는 짐가방 하나조차도 없었다. 정말 빈손으로 몸만 덜렁 온 것이다. 배짱 좋네, 뉴욕에 와보고 싶었던 놈 맞아?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준면은 그를 위해 번화가 상점까지 들러 속옷을 사주었다. 준면이 제 취향의 것을 추천하니 경수는 다른 까만색 팬티를 집으면서, "그거 입느니 속옷 안 입고 다닐래요"라며 소신있게 거절했다. 받는 입장이 대체 누군지 이젠 알 수 없을 지경이다.

둘은 다시 준면의 호텔 룸으로 돌아가 잠시 낮잠을 잤다. 준면은 침대에서, 경수는 카우치에 몸을 구기고 잤다. 경수가 먼저 눈을 떴다. 그는 잠에서 깬 뒤 뉴욕의 반짝이는 야경을 통유리 너머로 한참이나 바라봤다. 실내등을 켜지 않아도 내부 가구들이 훤히 비춰질 정도로 환했다.

아홉시 즈음 준면도 침대에서 일어나자 그제서야 허기가 졌다. 멀리 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준면은 그냥 호텔 레스토랑으로 갔다. 비싼 곳이 좋은 이유는 언제 가도 싫은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준면은 메뉴판에서 눈에 띄는 것마다 주문했고 경수는 늦은 점심을 미처 다 소화하지 못했는지 메인요리 하나만 골랐다.


와인을 주문하며 준면이 물었다.
"술 할 줄 알지?"
"조금은요."
"같이 좀 마셔줘. 일행 있는데 혼자 마시면 재미 없잖아."


그러나 준면의 이 선택은 이날 하루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된다.

경수는 준면의 예상보다도 술을 못 했고, 준면은 몸에 축축히 젖어들어간 피로 때문에 일찍 취해버렸다. 하필 레스토랑의 조명이 극도로 어둡기도 했고, 야경이 꼭대기 층의 시야를 꽉 메워 펼쳐진 탓도 있었으리라. 둘은 세 병째 와인을 땄다. 웨이터가 저 멀찍이서 둘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준면은 피실피실 웃었다.


"넌 왜 여기에 왔어?"

그 말에 경수는 또 저도 피실피실 웃으며 답했다.

"안 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거 내가 했던 말 같은데?"
"크큭..."


둘은 다시 잔을 부딪혔다. 너무 드라이하지도 너무 달지도 않은 적당한 산도의 와인이 콧속까지 향내를 풍겼다. 준면은 불빛에 잔을 비춰보았다. 반짝반짝, 와인 속에서 별무리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어찌되든 상관 없어요. 세상 어디든, 어느 기지에 있든 상관 없고, 거기서 뭘 하든 상관 없고... 내가 뭘 연구하든 상관 없어요. 사람 사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거예요."


불분명한 발음으로 경수가 중얼댔다. 준면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경수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아마 굉장히 인상이 좋지 않게 보일 것이었다.
아주 느린 피아노곡이 레스토랑 전체에 아까부터 한참동안이나 울리고 있었다. 테이블에 팔을 괴고 경수는 이제 준면을 아주 빤히 바라보기 시작한다. 빤히. 꿰뚫듯이. 관통하듯이. 관찰하듯이. 잡아먹듯이.
그러더니 뜻모를 소릴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내가 지금 당신한테 키스하면 이상한 일인가요?"


푸흐흐, 취한 탓인지 그 말에 준면은 웃음부터 터졌다. 이 당돌한 후배님. 준면은 침대 위에서 무관심하게 플레이보이를 넘겨 보던 경수를 떠올렸다. '키스'같은 말은 이 남자에게 안 어울리는 단어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난 말이지. 이번에 뉴욕에 온 건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그랬어. 이제 두번 다시 어디에든 난 발 못 붙일 거라고. 그냥 콱 죽어버릴 거라고. 희망 같은 거 없다고..."


그러자 갑자기 테이블 너머 뻔뻔했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가는 게 보였다. 어라, 이게 아닌데. 분위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자, 준면은 얼른 말을 돌렸다.


"어차피 돌아갈 생각도 없었는데, 키스 정도야 뭐 어떻겠어. 응? 네 말마따나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지. 뭐가 이상한데? 이상한 일이 뭔데?"
"......."
"자, 해봐. 키스."


준면이 와인잔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도전적인 표정이 지어지는 걸 준면은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무언가가 바스락대며 움직인다는 것이 귀로 들렸다. 순식간에 어떤 질량이 쑥, 다가오더니, 준면의 입술 위로 온기를 띄는 살덩이가 내려앉았다. 뜨겁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의 입술에 좀 더 힘이 들어갔다. 뜻밖에도 경수의 키스는 신중했다. 혀를 섞는 딥키스는 아니었지만 주변의 기류를 모두 그러모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입맞춤이었다. 준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생각보다 입술이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호텔 침실에 경수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 준면은 잠에서 깬 뒤 한동안 어제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한참을 헤맸다.

화들짝 일어난 준면은 팬티 차림으로 룸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물론 경수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신발도 없다. 심지어 그가 어제 입었던 속옷도 사라졌다. 준면은 머리위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 거실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어제 경수가 낮잠을 잤던 카우치 위에 담요가 흐트러진 채 그대로였다. 준면은 다시 침실로 달려가 제 옷주머니를 뒤졌다. 어제 경수가 건넸던 명함을 찾아낸 그는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몇번이나 다시 걸어도 전화는 신호음만 묵묵히 지나가더니 나중엔 아예 상대방 전화가 꺼졌다는 알림이 나왔다.


이 자식 대체 뭐지?
어젠 대체 뭐였냐고?
나한테 그런 짓 해놓고 그대로 내뺀 거야, 이 자식!


그리고 준면은 곧장 기지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2015/09/26 23:48

[백면] 북회귀선 └단






진짜 이게 딱 마지막이에요. 하루만 줘요. 그럼 김준면 인생에서 영영 꺼질테니까요. 네?


그래서 준면은 지금 고속버스 안이다. 내가 어쩌다가? 그러나 빌어먹게도 상황은 마음이 물렁해질 수밖에 없도록 돌아가고 있었다. 딱 일 년만에 만난 전애인의 사연은 그토록 딱했던 것이다. 준면은 차창에 코를 딱 붙이고 팔짱을 낀 채 살짝 등돌린 자세로 앉았다. 옆자리에 앉아 모자를 푹 눌러쓴 백현은 아무런 나무람도 없다. 창에 성에가 꼈다. 얼음같이 시린 유리. 준면은 손가락 끝으로 창을 조금 닦아냈다. 바깥 풍경은 온 세상에 살짝 눈이 흩뿌려진 모습이었다. 버스 내부엔 습기가 찼다.


이제 더이상 피아노를 치기엔 틀렸다고 했다. 뭐라고 했던가. 비오는 날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다고 했나. 준면이 생각하기로 그건 그냥 변백현이 스스로 죽으려고 한 짓 같았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것까지 파고들자면 골치아파질 것 같아 준면은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내 탓은 아니겠지, 내 탓은 아니겠지, 그렇게 사고를 거듭할수록 역효과였다. 백현은 아무 말도 않았는데 이미 죄책감이 숨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어디어디 갔었다고 했죠?"


좌석은 듬성듬성 꽤 많이 비어있었다. 대전 즈음에 이르렀을때 백현이 소근대며 물었다. 얼핏 졸고 있었던 준면은 얼굴을 쓸어내리곤 멍하니 손가락을 접어가며 대답했다.


"브라질,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귀찮아서 대충 큼지막하게 생각나는 곳만 꼽았는데, 사실 경유한 곳까지 합치면 더 될 것이다. 백현은 하나씩 접히는 준면의 손가락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래요"하고 싱겁게 대답할 뿐이었다.


백현이 오토바이를 박살낸 것은 준면이 저 나라들 사이를 유랑하던 그 일 년 어드메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준면이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더위와 땀냄새와 때로는 고원의 희박한 대기에 몸을 부대끼고 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 백현은 제 몸을 아작내고 있었다는 말이다.


버스가 잠시 휴게소에서 정차했다. 서울에서 출발했을 때보다 날이 흐렸다. 준면은 그냥 히터바람 아래에서 게으르게 몸을 웅크리고 싶었는데 백현이 그를 잡아끌었다.


"일어나요, 일어나. 우리 모험 해봐요."


이때 백현이 말한 모험이라는 것은-버스가 잠시 정차한 그 10분 남짓의 시간동안 휴게소 우동을 격파하고 오는 일이었다. 물론 준면은 정색하는 낯으로 "미쳤어?"하고 반항했다. 그러나 행동이 잽싼 백현이 선수를 쳤다. 어느샌가 빠르게 조리된 우동이 그들 앞에 하나씩 놓였다. 준면은 못마땅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제 앞의 장애물을 해치웠다. 둘은 입천장이 다 까진 채로 아슬아슬하게 고속버스에 다시 올라탔다.


"너 솔직히 말해봐. 다친 거, 손이 아니라 머리지?"
"하하하. 형이야말로 남미에서 뒷통수 깨져 온 거 아니에요?"


쿨럭, 쿨럭. 하도 급하게 먹어서인지 가볍게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뱉으며 이번엔 백현이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더니 그는 괘씸하게도 버스에 재시동을 건 지 오 분도 되지 않아 잠들어버렸다. 아, 그냥 휴게소에서 이 놈을 따돌리고 차라리 조난당하는게 나았을걸. 이미 출발한 버스 안에서 준면은 후회했다.


일 년 하고도 조금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그즈음, 준면은 어느날 문득 새벽에 눈을 떴다. 잠에서 깼을 때의 으레 잠시 몽롱한 기분, 그런 것 없이 스위치의 온오프 상태처럼 갑자기 반짝 정신이 들었다. 옆에선 백현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못 하는 술을 마시고 자서 그랬다. 준면은 백현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야, 야, 변백현, 일어나봐, 백현아, 야.


"으음... 왜..."


부은 눈두덩에 술냄새와 잠을 덕지덕지 붙인 채 백현이 웅얼거렸다. 준면은 결단코 조금의 의심도 없이 선언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겠어."


그땐 왜 그랬던 걸까. 준면이 생각하기로 그건 일종의 계시였다. 백현과 애인관계로 지냈던 시간은 딱 일 년, 더도말고 일 년이었는데, 그 동안은 백현은 신입생의 허물을 조금씩 벗어가고 있던 시간이었다. 일 년간의 착란과 호르몬 교란이 점점 소강 상태를 맞았다고도 볼 수 있지만. 글쎄. 그보단 훨씬 더 미스터리하고 불가사의한 힘이었다. 뇌의 전두엽이나 해마 같은 부분을 칼로 오려 도려내듯 일시에 소멸되는 그 감각.


여전히 고속버스 차창으로는 옅은 겨울 풍경이 지나가고 있다. 마른 가지처럼, 준면은 제가 아주 비인간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직후 준면은 휴학계를 냈다. 솔직히 입장바꿔 생각해도 제가 나쁜 새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준면은 불가항력이라는 말밖에 변명할 길이 없다.
기말고사 기간 중, 백현과 동기인 박찬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형, 형, 변백현 미쳤어요. 갑자기 피아노를 부수더니 지금은 검은 건반을 자켓 주머니에 꽂고 다녀요. 얘 뭐 저지를 것 같아요.


그 말이 번뜩 생각났다. 준면은 어깨 너머로 백현을 확인했다. 어느새 다시 눈을 뜨고 뿌연 창만 노려보고 있었다. 준면이 물었다.


"그러고보니 검은 건반이 뭐야?"
"예?"
"검은 건반."


설명을 죄다 뚝 잘라먹고 던지는 질문에 백현이 잠시 생각하다, 아, 하고 비눗방울이 터지는 것처럼 깨달았다. 그거요.


"그거 형 목소리랑 제일 가까운 음이에요."
"아..."


그런 멍청한 탄식밖에는 반응할 길이 없었다. 그거 알아서 뭐 하게요. 코웃음친 백현이 다시 차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무작정 떠난 남미에서는 참으로 별별 일이 다 있었더랬다. 준면은 다섯 번쯤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할 뻔 했고, 세 번쯤 실탄이 장착된 총구 앞에 섰었다. 여권과 현금을 두 번 강도에게 털렸다. 택시에서 당했을 때는 카메라까지 뺏겼다. 그 놈은 갑자기 유리창을 부수더니 총부리를 마구 들이밀었었다. 그때쯤 대강 귀에 익은 에스파냐어로, 아마 "가진것 다 내놔!"였을 것이다. 준면은 자신에겐 이제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단어를 조합해 말하는 것은 입안에서만 떠돌 뿐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아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더라면 준면은 그날 이마에 총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 날의 정확한 일시를 준면은 몰랐지만, 사실 그가 생명을 위협하던 옛 제국 언어 앞에 섰던 그 시각, 태평양을 사이에 둔 모국에서는 때마침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빗줄기 사이에서 백현이 타고 있던 오토바이의 계기판은 세 자리 숫자를 돌파하고 있었다. 북회귀선 너머에서 둘은 같은 시각 꺼져가는 생명 위에 있었던 것이다.


고속버스가 목적지에 멈춘 뒤 택시를 잡아 타고 둘은 곧 해안가 근처에 내렸다. 도착하고서도 준면은 해수욕장의 이름조차 몰랐으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바닷바람이 살을 조금씩 떼다가 도려내는 듯 너무 차가웠다. 백현은 바람에 날아가려는 모자를 아예 벗어 손에 쥐더니 크게 팔을 벌렸다.


으아아아! 백현이 마구 소리를 지르며 옆에 있던 준면의 손을 낚아채 언덕길을 뛰쳐내려가기 시작했다. 야, 야, 이 미친놈아! 준면의 입에서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욕이 튀어나왔다. 당연하지만 평일날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둘은 거의 세상의 미아처럼, 심지어 중력도 무시한 채 비탈길을 달려갔다. 미친듯이 준면을 끌어당기며 바다로 향하던 백현은 끝내 속도에 이기지 못하고 모래밭에 풀썩 엎어졌다. 준면도 물론 함께였다.


"크... 아퍼."
"하아... 하... (백현은 대자로 누운 채 숨을 골랐다.) 형 혹시 그거 기억나요?"


그때, 술 먹고 학교 동상에 올라갔던거. 백현이 준면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물론 기억나다마다.' 그날 공기에서 떠돌던 은행의 꿉꿉한 냄새까지, 준면은 기억한다. 고정 멤버들끼리 술을 또 왕창 퍼마신 날이었는데, 어느샌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와 백현 둘만 남아있었다. 백현은 머리끝까지 취해있었다. 원래도 술을 잘 못하는 인간이다. 빈 술병을 붙잡고, 백현은 근처 동상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초대 학장이던가, 아니면 학교 상징 동물이던가, 아무튼 그런 동상이었다. 준면도 어지간히 취한 상태여서 신입생의 헛짓거리를 내버려두고만 있었다. 낑낑 힘겹게 올라 정상을 차지한 백현이 준면을 향해 고래고래 물었다.


"나 뭐라고 소리지를까요? '나는 세상의 왕이다!'"
"미친... 구리거든?"


그러나 아랑곳않고 백현은 제가 뱉고 싶은 말을 지껄였다. 지나간 옛 히트작의 불멸한 대사를 소리치고 있자니 저기서부터 경비원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 경비원도 이런 추태를 하루이틀 보는 것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으리라. 백현은 죽을 듯이 웃더니 동상에서 반쯤 내려와 준면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그는 시뻘게져 소주 냄새를 풍기는 채로 준면에게 키스했다.

그 시절, 학교 건물 뒤편에서 피우던 무수한 담배들과, 나태와 방탕의 상징처럼 휘날리던 꿉꿉한 자취방 이불. 소란이 전부였고 미래는 정지한 것처럼 느껴졌던 일 년간.


그들이 너무 늦은 오후에 출발했던 탓에 해안가엔 이미 일몰이 지고 있었다. 이제 두번 다시 그들의 연애가 없으리라는 건 너무도 명확했다. 삭아버린 시간에서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각의 파편들과 조개의 시체들 사이에서 백현은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준면은 문득, 제가 남미로 떠나기 직전부터 줄곧 제 폐가 기형처럼 찌그러진 채 숨을 쉴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지껏 백현은 준면의 손을 꼭 잡은 채였다. 그는 이제 지나간 연인의 손등 위로 입술을 눌렀다.


"난 배를 타고 돌아갈게요."


그러더니 백현은 조용히 웃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실감하는 북반구의 겨울 아래서 준면은 대양 너머의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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